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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시론] 찬성만 가득한 조직은 지금 침몰 중, '반대'라는 명약을 거부하는 리더들에게...,
[지구일보 이창호 칼럼니스트] 오늘날 우리 사회의 리더십은 심각한 ‘확증 편향’의 늪에 빠져 있다. 정치는 진영 논리에 갇혀 반대편의 목소리를 ‘악(惡)’으로 규정하고, 기업과 조직은 효율이라는 미명 하에 상명하복의 침묵을 강요한다. 그러나 분명히 직시해야 할 사실이 있다. 찬성만 가득한 회의실은 리더의 유능함을 증명하는 장소가 아니라, 조직이 서서히 침몰하고 있음을 알리는 선명한 경고등이라는 점이다. ◇ 반대는 ‘불온한 도전’이 아닌 ‘최후의 보루’다 권위주의적 관성에 젖은 리더들은 반대 의견을 자신의 집정력에 괸한 도전이나 조직의 화합을 깨뜨리는 ‘불온한 잡음’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이는 본말이 전도된 시각이다. 조직을 진정으로 위협하는 것은 날카로운 반대가 아니라, 리더의 오판을 보고도 입을 닫는 ‘굴종적 침묵’이다. 역사의 비극은 언제나 리더의 귀를 즐겁게 하는 ‘예스맨’들의 합창 속에서 잉태되었다. 반대 목소리는 조직의 눈을 가리는 안개를 걷어내고, 리더의 독단이 낭떠러지로 향하지 않도록 붙잡는 최후의 안전장치다. 이 장치를 스스로 제거하는 리더는 스스로를 고립된 성벽 안에 가두는 격이며, 결국 그 성은 안으로부터 썩어 문드러지기 마련이다. ◇ 겸손함이 없는 리더십은 폭력이다 훌륭한 리더와 무능한 리더를 가르는 결정적 한 끗은 ‘지적 겸손함’에 있다.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는 지도력은 소통이 아니라 폭력이다. 자신의 경험과 직관만을 절대 선으로 믿고, 또 반대 의견을 주장하는 구성원을 수동적인 ‘부속품’으로 전락시킨다. 게다가 생각의 차이를 견디지 못하는 리더는 결국 자신보다 무능한 사람들만 곁에 두게 된다. 반면, 훌륭한 리더는 자신보다 뛰어난 반대자의 논리를 즐기며, 그 갈등의 에너지를 동력으로 삼는다. 반대를 두려워하는 리더는 자신의 약함을 숨기려 애쓰는 겁쟁이에 불과하지만, 반대를 경청하는 리더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 조직의 완성도를 높이는 전략가다. ◇ ‘심리적 안전감’이 혁신의 본령이다 혁신은 결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나오지 않는다. 혁신은 치열한 성찰과 자기 비판, 그리고 대안의 충돌이라는 용광로를 거쳐야만 그 형체를 드러낸다. 리더의 역할은 구성원들이 비판받을 두려움 없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을 보장하는 것이다. 반대 의견을 냈을 때 불이익을 걱정해야 하는 조직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다. 리더는 구성원들의 입을 막는 ‘권위의 칼’을 내려놓고, 누구나 자유롭게 논쟁할 수 있는 ‘광장의 자리’를 깔아야 한다. 반대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일그러진 전략을 끊임없이 수정하는 리더만이 조직을 지속 가능한 미래로 견인할 수 있다. ◇ 기필코, 반대자를 동반자로 삼으라 지금 시대가 갈망하는 리더는 무결점의 초인이 아니다. 반대 의견 속에서 보석 같은 통찰을 발견할 줄 아는 혜안을 가진 사람, 그리고 자신을 향한 비판을 혁신의 자양분으로 삼을 줄 아는 역량을 가진 사람이다. 리더여, 당신의 결정에 토를 다는 이들을 곁에 두라. 당신의 확신에 찬물을 끼얹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당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 ‘반대’야말로, 당신과 당신의 조직을 파멸에서 구할 유일한 명약이다. 반대라는 거울을 깨뜨리는 리더에게는 미래가 없다. [붙임] 이 기사가 마음에 닿으셨다면, 주변의 작은 광고 한 번 눌러 주시면 힘이 됩니다.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더 나은 기사와 정직한 보도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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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겻불을 거부하는 자부심, 지금 우리에게 '선비 정신'은 있는가
[지구일보 이창호 발행인] 오늘날의 효율 지상주의와 실용주의 관점에서 보면 이 말은 고리타분한 고집이나 시대착오적인 결벽증으로 읽힐지 모른다. 당장 얼어 죽을 판에 겨를 태운 보잘것없는 불이면 어떻고, 남이 쓰다 버린 온기면 어떠냐는 반문이 뒤따른다. 하지만 이 서늘한 문장 속에 담긴 본질은 단순히 추위를 참는 인내심에 있지 않다. 그것은 '비루하게 사느니 나의 긍지를 지키겠다'는 자기 원칙이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결과 중심 사회를 향한 준엄한 경고다. ◇ 겻불의 유혹, 원칙을 팔아 치우는 시대 우리가 사는 작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겻불'이 도처에 널려 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과정의 정의로움 따위는 생략해도 좋다는 식의 결과론적 사고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권력이라는 겻불을 쬐기 위해 어제의 신념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정치인, 부(富)라는 온기를 얻기 위해 타인의 눈물을 외면하는 자본, 그리고 대중의 관심을 얻기 위해 가짜 뉴스와 혐오를 생산하는 미디어까지 말이다. 과연 이들에게 '선비의 지조'는 조롱의 대상일 뿐이다. "일단 살고 봐야지",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식의 타협안은 우리 시대의 알량한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겻불은 잠깐의 온기만 줄 뿐, 몸속 깊은 곳의 한기를 몰아내지 못한다. 오히려 겻불에 몸을 녹이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옷'이 타들어 가는지도 모른 채 비굴한 안락함에 중독되고 만다. ◇ 선비 정신은 '자기 증명'의 기록이다 선비가 겻불을 거부한 이유는 그것이 '나의 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얻은 혜택, 구걸하듯 얻어낸 온기는, 결국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행위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주체적 자존감'의 문제와 직결된다. 진정한 리더와 깨어 있는 시민은 겻불 대신 스스로 장작을 패고 불을 지피는 고통을 선택한다. 비록 그 과정이 더디고 춥더라도, 스스로 일궈낸 온기만이 개인과 조직을 당당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원칙을 지키느라 겪는 고난은 '상처'가 아니라 위대한 '훈장'이다. 얼어 죽을지언정 겻불을 쬐지 않겠다는 결기는,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내면의 기둥을 세우는 작업이다. ◇ 타협의 미덕이라는 가면을 벗겨라 현대 사회는 갈등 조율이라는 명목하에 '타협'을 미화한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 합의는 중요하다. 그러나 결코 타협해서는 안 될 가치마저 겻불과 맞바꾸는 것은 합의가 아니라 '투항'이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수많은 부조리는 리더들이 '겻불의 유혹'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발생했다. 공정의 도덕적 가치를 훼손하면서 얻은 성과, 정의를 외면하며 쌓아 올린 평화는 모두 겻불에 불과하다. 그것은 언젠가 재만 남기고 사라질 허상이며, 그 재는 결국 우리 사회의 눈을 멀게 할 것이다. 선비 정신은 바로 그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모두가 겻불 주위에 모여들어 서로의 등을 다독일 때, 홀로 찬 바람을 맞으며 '이 길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 용기가 우리 사회의 마지막 도덕적 규범이 되어야 한다. ◇ 다시, 겻불 앞에 서서 우리는 저마다의 추위 속에 살고 있다. 불확실한 미래, 치열한 경쟁, 생존의 위협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겻불을 쬐라고 유혹한다. 게다가 "딱 한 번만 눈 감으면 따뜻해질 수 있다"는 속삭임은 달콤하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겻불을 쬐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조금 춥더라도, 조금 외롭더라도 자신의 불꽃을 지키며 꼿꼿이 서 있는 이들이 있을 때 사회는 비로소 품격을 갖춘다. 지금 당신의 눈앞에 놓인 그 온기는 정당한가? 혹시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한, 혹은 자신의 양심을 태워 만든 겻불은 아닌가? 얼어 죽을지언정 겻불은 쬐지 않겠다는 그 준엄한 기개가 있어야한다. 또 역설적으로는 우리 사회를 가장 따뜻하고 존엄하게 만드는 원동력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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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일보] 한중정상회담 이후..., 한중상징을 넘어 전략으로
[지구일보 이창호 대기자] 지난 1월에 열린 한중 정상회담은 양국 관계가 다시 조정 국면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였다. 이번 한중정상회담의 의미는 단순한 만남 자체에 있지 않다. 핵심은 정상 간 소통이라는 상징을 어떻게 지속 가능한 전략으로 전환하느냐에 있다. 외교는 대화로 출발하지만, 관계의 진전은 이후의 정책적 선택과 실행력에 의해 결정된다. 한중관계는 지난 수년간 구조적 긴장을 겪어왔다. 미·중 전략 경쟁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한국은 외교적 압박을, 중국은 전략적 불신을 동시에 키워왔다. 그 결과 정치적 소통은 위축되고, 경제 협력 역시 불확실성 속에 놓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개된 한중정상회담은 단절의 흐름을 멈추고, 관계를 관리와 조정의 단계로 되돌려 놓았다는 점에서 크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감정적 관계 복원이 아니라 실용적 협력의 복원이다. 한중 양국은 이미 깊이 연결된 경제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 공급망 안정, 첨단 산업, 기후 변화 대응, 보건·환경 협력,양해각서 이행 등은 체제와 이념을 넘어 공동의 이해가 존재하는 영역이다. 경쟁이 불가피한 분야가 있다면, 그 경쟁을 통제할 제도적 장치와 소통 채널을 마련하는 것이 성숙한 관계의 출발점이다. 중국 역시 주변국 외교에서 새로운 선택을 요구받고 있다. 영향력의 확대가 곧 신뢰의 축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공동 번영과 협력을 강조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절제와 예측 가능성이 전제돼야 한다. 한국과의 관계에서도 상호 존중과 규범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질 때, 협력은 보다 안정적인 토대를 갖게 된다. 한국의 외교 전략 또한 보다 능동적일 필요가 있다. 한미동맹을 외교의 축으로 유지하되, 중국과의 관계를 단순한 선택의 문제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중견국 외교의 강점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조정 능력에 있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협력의 공간을 관리하는 전략적 유연성은 회피가 아니라 외교 핵심역량이다. 이번 한중 정상회담 이후의 관계는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정상 간 합의가 선언적 수준에 머물 것인지, 아니면 실무 협력과 정책적 조율로 이어질지는 지금부터의 선택에 달려 있다. 상징은 이미 만들어졌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를 더 구체화할 전략과 실행력이다. 관계 개선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다. 한중관계가 협력의 궤도로 다시 진입한다면, 이는 양국 모두의 실익에 부합할 뿐 아니라 동북아 지역의 안정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외교는 상대를 압박하는 기술이 아니라, 차이를 관리하며 공존을 설계하는 지혜다. 한중 정상회담 이후의 외교는 바로 그 지혜를 요구받고 있다. 한편, 이창호 한중교류촉진위원회 위원장은 “이번 한중 정상회담은 관계 회복의 상징을 넘어 실질 협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 중요한 출발점”이라며 “한중정상 간 소통이 재개된 만큼, 이제는 공급망 안정과 기후·보건 등 협력 가능한 분야에서 구체적 성과를 만들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어 “호상 경쟁은 관리하되, 신뢰는 행동으로 쌓아가는 전략적 적정성이 향후 한중관계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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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론] 성직자의 정치 참여, '양심의 자유'와 '정교분리'의 외줄타기
[지구일보이창호 발행인] 종교와 정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동반자이자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때로는 성스러움이 세속을 구원하기도 했고, 때로는 권력의 탐욕이 신성(神性)을 오염시키기도 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다시금 불붙고 있는 성직자의 정치 참여 논란은 헌법이 보장한 '정교분리'의 원칙과 개인의 '양심 및 표현의 자유'라는 두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에 서 있다. 이를 단순한 찬반의 논리로 재단하기에 앞서, 우리는 성직자라는 특수한 신분이 갖는 도덕적 무게와 그 영향력을 냉철하게 응시해야 한다. 성직자의 정치 참여를 옹호하는 측은, 성직자 또한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임을 강조한다. 헌법 제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종교에 의해 정치적·사회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성직자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거나, 보편적 인권과 정의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광장에 나서는 것을 '종교의 정치 개입'으로만 매도할 수는 없다는 논리다. 역사의 변곡점마다 종교계가 보여준 예언자적 비판 정신은 민주화와 인권 신장에 기여한 바가 크다. 그러나 문제는 '참여의 방식'과 '정치적 중립성'의 훼손에 있다. 성직자의 말 한마디는, 시민의 사회적 무게감이 다르다. 신도들에게는 신의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영적 권위를 지니기 때문이다.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노골적으로 지지하거나, 종교적 교리를 이용해 정치적 적대감을 고취하는 행위는 종교의 본질인 화합과 사랑을 스스로 부정하는 처사다. 이는 신앙의 공동체를 이념의 전장(戰場)으로 변질시키고,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기보다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특히 한국 사회처럼 종교적 다양성이 공존하는 다종교 사회에서 특정 종교인의 편향된 정치 행보는 자칫 종교 간 갈등이나 사회적 분열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우리 헌법 제20조 제2항이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고 명시한 이유는 정치가 종교를 이용하거나, 종교가 국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비극을 막기 위함이다. 성직자가 강단에서 특정 정파의 논리를 전파하는 순간, 종교는 세속적 권력투쟁의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진정한 의미의 성직자의 정치 참여는 '정치 권력에의 편승'이 아니라 '시대적 가치의 수호'여야 한다. 특정 이념의 전사가 되기보다는, 우리 사회가 놓치고 있는 도덕적 가치와 공동체의 선(善)을 일깨우는 '사회의 빛과 소금'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되, 스스로 권력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다. 결국 성직자의 정치 참여가 정당성을 얻으려면 엄격한 자기 절제와 성찰이 전제되어야 한다. 성직자의 옷을 입고 행하는 모든 정치적 언사는 개인의 자유를 넘어 종교 전체의 신뢰와 직결된다. 종교가 정치를 정화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종교를 오염시키는 현실을 목도하며, 우리는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성직자들이 서 있는 곳은 진정 낮은 곳을 향한 헌신의 자리인가, 아니면 세속의 권력을 탐하는 탐욕의 자리인가. 성직자는 정치적 사안에 대해 침묵할 의무는 없으나, 자신의 권위가 갖는 파괴력을 직시해야 한다. 정치가 증오와 배제의 언어로 가득 찬 시대일수록, 종교는 그 너머의 화해와 통합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이 성직자에게 부여된 진정한 사회적 책무이자, 정치 참여의 한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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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일보] 천 년의 비단길에서 디지털 런웨이로... 중국 패션의 역사적 변천과 미래적 응시
[지구일보 김지윤 한중문화칼럼니스트] 패션은 단순히 몸을 감싸는 천의 조합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의 이데올로기, 기술의 진보, 그리고 한 민족의 자존감이 응축된 ‘입는 역사서’다. 특히 중국 패션은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던 오색찬란한 비단에서부터, 혁명의 획일성을 상징하던 인민복을 거쳐, 이제는 전 세계 미학의 기준을 새롭게 정의하는 ‘신중국주의(New Chineseness)’에 이르기까지 극적인 파노라마를 그려왔다. 본 칼럼에서는 중국 패션의 역사적 흐름을 짚어보고, 현대 중국 패션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성을 알아본다. ◈ 역사적 흐름, 권위와 혁명, 그리고 개방의 연대기 ① 제국의 영광, 복식으로 쓴 위계의 서사 전통 시대 중국 패션은 ‘예(禮)’의 산물이었다. 한푸(漢服)로 대표되는 고대 복식은 소매의 넓이, 허리띠의 색상, 수놓아진 문양 하나하나에 엄격한 계급적 질서를 담았다. 청나라 시대의 치파오(旗袍) 역시 본래 만주족 여인들의 헐렁한 의복에서 시작되어 왕실의 권위를 상징했다. 이 시기 중국 패션의 핵심은 ‘독보적 기법’이었다. 옷감 특유의 질감으로 경외감을 만들듯, 당시의 자수와 직조 기술은 그 자체로 국가적 IP(지식재산권)였다. ② 혁명의 시대, 획일화된 정체성, 인민복(中山裝) 20세기 중반, 중국 패션은 거대한 단절을 겪는다. 쑨원이 고안하고 마오쩌둥이 상징화한 인민복은 계급을 타파하고 평등을 지향하는 혁명의 유니폼이었다. 화려함은 거세되었고, 실용성과 통제된 질서만이 남았다. 이 시기는 패션이 개인의 개성이 아닌 집단의 미션을 수행하던 시기였다. ③ 개방과 모방, 서구 미학의 유입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 중국 패션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서구의 유행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서 타인의 도상을 복제하며 상업적 성장을 이뤘으나, 작가적 주체성은 부재했다. ◈ 현대 패션의 향방, 궈차오(國潮)에서 신중식(新中式)으로 오늘날 중국 패션은 더 이상 서구의 추종자가 아니다. 현재 중국 현대 패션의 방향성은 크게 세 가지 축으로 요약된다. ① 국조(國潮, Guochao), 전통의 ‘힙’한 재해석 젊은 세대인 Z세대가 주도하는 ‘궈차오’ 열풍은 애국 소비를 넘어선 미학적 혁명이다. 이는 전통문화의 파편들을 스트릿 패션이라는 현대적 그릇에 담아내는 과정이다. 한자를 그래픽화하고, 사찰의 단청 색감을 스니커즈에 이식한다. 이는 예술경영의 ‘창조적 파괴’ 이론을 실천하는 현상으로, 낡은 전통을 가장 강력한 현대적 콘텐츠로 부활시켰다. ② 신중식(新中式), 절제와 포용의 미학 최근 트렌드는 자극적인 국조를 넘어 ‘신중식’이라는 고차원적 미학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는 치파오의 형태를 해체하여 현대적인 오버사이즈 실루엣에 녹여내거나, 도자기의 유려한 곡선을 의복의 패턴으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서구의 패션이 인체의 곡선을 드러내는 ‘강조’에 집중한다면, 신중식은 인체를 감싸고 품는 ‘여백’과 ‘흐름’에 집중한다. ③ 디지털 피지털(Phygital) 생태계 다니엘 아샴이 가상 고고학이라는 서사를 디지털 미디어로 전파하듯, 중국 패션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IT 생태계를 적극 활용한다. 가상 의류(Digital Wear), 라이브 커머스를 통한 실시간 서사 전달은 중국 패션을 단순한 제조업이 아닌 ‘디지털 문화 IP 산업’으로 격상시켰다. ◈ 미래의 방향성, 지속 가능한 철학적 패션 미래 중국 패션이 나아갈 최종 종착지는 ‘정신적 안식처로서의 옷’이다. 첫째, 지속 가능성에 대한 집착이다. 전통적인 천연 염색 기법과 재생 소재의 결합은 전 세계적인 환경 위기 속에 중국 패션이 던지는 대안적 메시지다. 둘째, 포용적 디자인이다. 패션마저 글로벌세계관을 바탕으로 나이와 체형에 상관없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형태의 의복이 주류를 이룰 것이다. 중국 패션의 역사는 권위에서 투쟁으로, 다시 모방에서 창조로 굽이쳐 왔다. 이제 중국 패션은 그릇에 흙의 결이 겹겹이 쌓여 단단해지듯, 수천 년의 시간을 겹겹이 쌓아 올려 세계라는 거대한 관객을 품으려 하고 있다. 따라서, 미래의 중국 패션은 현대인의 고단한 영혼을 따스하게 품어주는 ‘문화적 그릇’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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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한국은 춘절에, 중국 관광객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는가
[지구일보 이강문 기자] 한국이 중국인 관광객의 주요 목적지로 일본을 제치고 선두에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다가오는 중국 춘절 연휴 기간 동안 또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중국인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여행지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분석이다. 시장 조사 기관인 중국무역데스크에 따르면, 2월 15일부터 9일간 이어지는 춘절 연휴 동안 약 23만~25만 명의 중국인 관광객이 한국을 방문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지난해보다 52% 증가한 수치로, 연휴 기간이 하루 더 늘어난 점도 영향을 미쳤다. 반면 일본을 찾는 중국인 관광객 수는 2022년에 비해 60%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엔화 약세에도 불구하고 중·일 간 정치적 긴장 관계, 그리고 한국이 중국 단체 관광객에 대해 무비자 정책을 시행한 점이 여행 수요의 방향을 바꿨다는 분석이다. 상대적으로 약세를 보이는 원화 역시 서울과 부산, 제주 등 한국의 주요 관광지를 ‘가성비 여행지’로 부각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적정한 쇼핑과 식사, 여기에 K-콘텐츠를 중심으로 한 한국 문화의 세계적 확산이 관광 매력을 끌어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준비다. 숫자로 확인되는 기대감과 달리, 현장의 체감 준비 수준은 여전히 물음표다. 팬데믹 이전 중국 단체 관광객에 크게 의존했던 관광 인프라는 상당 부분 약화됐고, 중국어 안내 인력과 결제·교통 편의성, 지역 관광지의 수용 능력 역시 충분히 회복됐다고 보기 어렵다. 단기 소비에만 초점을 맞춘 쇼핑 중심 관광이 반복될 경우 지역 경제에 남는 것은 크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이 일본을 제치고 ‘선택받은 목적지’가 된 것은 기회다. 그러나 이 기회가 일시적 반사이익에 그칠지, 지속 가능한 관광 경쟁력으로 이어질지는 정책과 현장의 준비에 달려 있다. 2026년 춘절은 시작일 뿐이다. 한국은 정말로 중국 관광객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제 그 질문에 답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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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시론] 찬성만 가득한 조직은 지금 침몰 중, '반대'라는 명약을 거부하는 리더들에게...,
- [지구일보 이창호 칼럼니스트] 오늘날 우리 사회의 리더십은 심각한 ‘확증 편향’의 늪에 빠져 있다. 정치는 진영 논리에 갇혀 반대편의 목소리를 ‘악(惡)’으로 규정하고, 기업과 조직은 효율이라는 미명 하에 상명하복의 침묵을 강요한다. 그러나 분명히 직시해야 할 사실이 있다. 찬성만 가득한 회의실은 리더의 유능함을 증명하는 장소가 아니라, 조직이 서서히 침몰하고 있음을 알리는 선명한 경고등이라는 점이다. ◇ 반대는 ‘불온한 도전’이 아닌 ‘최후의 보루’다 권위주의적 관성에 젖은 리더들은 반대 의견을 자신의 집정력에 괸한 도전이나 조직의 화합을 깨뜨리는 ‘불온한 잡음’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이는 본말이 전도된 시각이다. 조직을 진정으로 위협하는 것은 날카로운 반대가 아니라, 리더의 오판을 보고도 입을 닫는 ‘굴종적 침묵’이다. 역사의 비극은 언제나 리더의 귀를 즐겁게 하는 ‘예스맨’들의 합창 속에서 잉태되었다. 반대 목소리는 조직의 눈을 가리는 안개를 걷어내고, 리더의 독단이 낭떠러지로 향하지 않도록 붙잡는 최후의 안전장치다. 이 장치를 스스로 제거하는 리더는 스스로를 고립된 성벽 안에 가두는 격이며, 결국 그 성은 안으로부터 썩어 문드러지기 마련이다. ◇ 겸손함이 없는 리더십은 폭력이다 훌륭한 리더와 무능한 리더를 가르는 결정적 한 끗은 ‘지적 겸손함’에 있다.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는 지도력은 소통이 아니라 폭력이다. 자신의 경험과 직관만을 절대 선으로 믿고, 또 반대 의견을 주장하는 구성원을 수동적인 ‘부속품’으로 전락시킨다. 게다가 생각의 차이를 견디지 못하는 리더는 결국 자신보다 무능한 사람들만 곁에 두게 된다. 반면, 훌륭한 리더는 자신보다 뛰어난 반대자의 논리를 즐기며, 그 갈등의 에너지를 동력으로 삼는다. 반대를 두려워하는 리더는 자신의 약함을 숨기려 애쓰는 겁쟁이에 불과하지만, 반대를 경청하는 리더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 조직의 완성도를 높이는 전략가다. ◇ ‘심리적 안전감’이 혁신의 본령이다 혁신은 결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나오지 않는다. 혁신은 치열한 성찰과 자기 비판, 그리고 대안의 충돌이라는 용광로를 거쳐야만 그 형체를 드러낸다. 리더의 역할은 구성원들이 비판받을 두려움 없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을 보장하는 것이다. 반대 의견을 냈을 때 불이익을 걱정해야 하는 조직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다. 리더는 구성원들의 입을 막는 ‘권위의 칼’을 내려놓고, 누구나 자유롭게 논쟁할 수 있는 ‘광장의 자리’를 깔아야 한다. 반대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일그러진 전략을 끊임없이 수정하는 리더만이 조직을 지속 가능한 미래로 견인할 수 있다. ◇ 기필코, 반대자를 동반자로 삼으라 지금 시대가 갈망하는 리더는 무결점의 초인이 아니다. 반대 의견 속에서 보석 같은 통찰을 발견할 줄 아는 혜안을 가진 사람, 그리고 자신을 향한 비판을 혁신의 자양분으로 삼을 줄 아는 역량을 가진 사람이다. 리더여, 당신의 결정에 토를 다는 이들을 곁에 두라. 당신의 확신에 찬물을 끼얹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당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 ‘반대’야말로, 당신과 당신의 조직을 파멸에서 구할 유일한 명약이다. 반대라는 거울을 깨뜨리는 리더에게는 미래가 없다. [붙임] 이 기사가 마음에 닿으셨다면, 주변의 작은 광고 한 번 눌러 주시면 힘이 됩니다.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더 나은 기사와 정직한 보도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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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시론] 찬성만 가득한 조직은 지금 침몰 중, '반대'라는 명약을 거부하는 리더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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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겻불을 거부하는 자부심, 지금 우리에게 '선비 정신'은 있는가
- [지구일보 이창호 발행인] 오늘날의 효율 지상주의와 실용주의 관점에서 보면 이 말은 고리타분한 고집이나 시대착오적인 결벽증으로 읽힐지 모른다. 당장 얼어 죽을 판에 겨를 태운 보잘것없는 불이면 어떻고, 남이 쓰다 버린 온기면 어떠냐는 반문이 뒤따른다. 하지만 이 서늘한 문장 속에 담긴 본질은 단순히 추위를 참는 인내심에 있지 않다. 그것은 '비루하게 사느니 나의 긍지를 지키겠다'는 자기 원칙이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결과 중심 사회를 향한 준엄한 경고다. ◇ 겻불의 유혹, 원칙을 팔아 치우는 시대 우리가 사는 작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겻불'이 도처에 널려 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과정의 정의로움 따위는 생략해도 좋다는 식의 결과론적 사고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권력이라는 겻불을 쬐기 위해 어제의 신념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정치인, 부(富)라는 온기를 얻기 위해 타인의 눈물을 외면하는 자본, 그리고 대중의 관심을 얻기 위해 가짜 뉴스와 혐오를 생산하는 미디어까지 말이다. 과연 이들에게 '선비의 지조'는 조롱의 대상일 뿐이다. "일단 살고 봐야지",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식의 타협안은 우리 시대의 알량한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겻불은 잠깐의 온기만 줄 뿐, 몸속 깊은 곳의 한기를 몰아내지 못한다. 오히려 겻불에 몸을 녹이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옷'이 타들어 가는지도 모른 채 비굴한 안락함에 중독되고 만다. ◇ 선비 정신은 '자기 증명'의 기록이다 선비가 겻불을 거부한 이유는 그것이 '나의 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얻은 혜택, 구걸하듯 얻어낸 온기는, 결국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행위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주체적 자존감'의 문제와 직결된다. 진정한 리더와 깨어 있는 시민은 겻불 대신 스스로 장작을 패고 불을 지피는 고통을 선택한다. 비록 그 과정이 더디고 춥더라도, 스스로 일궈낸 온기만이 개인과 조직을 당당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원칙을 지키느라 겪는 고난은 '상처'가 아니라 위대한 '훈장'이다. 얼어 죽을지언정 겻불을 쬐지 않겠다는 결기는,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내면의 기둥을 세우는 작업이다. ◇ 타협의 미덕이라는 가면을 벗겨라 현대 사회는 갈등 조율이라는 명목하에 '타협'을 미화한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 합의는 중요하다. 그러나 결코 타협해서는 안 될 가치마저 겻불과 맞바꾸는 것은 합의가 아니라 '투항'이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수많은 부조리는 리더들이 '겻불의 유혹'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발생했다. 공정의 도덕적 가치를 훼손하면서 얻은 성과, 정의를 외면하며 쌓아 올린 평화는 모두 겻불에 불과하다. 그것은 언젠가 재만 남기고 사라질 허상이며, 그 재는 결국 우리 사회의 눈을 멀게 할 것이다. 선비 정신은 바로 그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모두가 겻불 주위에 모여들어 서로의 등을 다독일 때, 홀로 찬 바람을 맞으며 '이 길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 용기가 우리 사회의 마지막 도덕적 규범이 되어야 한다. ◇ 다시, 겻불 앞에 서서 우리는 저마다의 추위 속에 살고 있다. 불확실한 미래, 치열한 경쟁, 생존의 위협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겻불을 쬐라고 유혹한다. 게다가 "딱 한 번만 눈 감으면 따뜻해질 수 있다"는 속삭임은 달콤하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겻불을 쬐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조금 춥더라도, 조금 외롭더라도 자신의 불꽃을 지키며 꼿꼿이 서 있는 이들이 있을 때 사회는 비로소 품격을 갖춘다. 지금 당신의 눈앞에 놓인 그 온기는 정당한가? 혹시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한, 혹은 자신의 양심을 태워 만든 겻불은 아닌가? 얼어 죽을지언정 겻불은 쬐지 않겠다는 그 준엄한 기개가 있어야한다. 또 역설적으로는 우리 사회를 가장 따뜻하고 존엄하게 만드는 원동력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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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겻불을 거부하는 자부심, 지금 우리에게 '선비 정신'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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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일보] 한중정상회담 이후..., 한중상징을 넘어 전략으로
- [지구일보 이창호 대기자] 지난 1월에 열린 한중 정상회담은 양국 관계가 다시 조정 국면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였다. 이번 한중정상회담의 의미는 단순한 만남 자체에 있지 않다. 핵심은 정상 간 소통이라는 상징을 어떻게 지속 가능한 전략으로 전환하느냐에 있다. 외교는 대화로 출발하지만, 관계의 진전은 이후의 정책적 선택과 실행력에 의해 결정된다. 한중관계는 지난 수년간 구조적 긴장을 겪어왔다. 미·중 전략 경쟁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한국은 외교적 압박을, 중국은 전략적 불신을 동시에 키워왔다. 그 결과 정치적 소통은 위축되고, 경제 협력 역시 불확실성 속에 놓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개된 한중정상회담은 단절의 흐름을 멈추고, 관계를 관리와 조정의 단계로 되돌려 놓았다는 점에서 크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감정적 관계 복원이 아니라 실용적 협력의 복원이다. 한중 양국은 이미 깊이 연결된 경제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 공급망 안정, 첨단 산업, 기후 변화 대응, 보건·환경 협력,양해각서 이행 등은 체제와 이념을 넘어 공동의 이해가 존재하는 영역이다. 경쟁이 불가피한 분야가 있다면, 그 경쟁을 통제할 제도적 장치와 소통 채널을 마련하는 것이 성숙한 관계의 출발점이다. 중국 역시 주변국 외교에서 새로운 선택을 요구받고 있다. 영향력의 확대가 곧 신뢰의 축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공동 번영과 협력을 강조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절제와 예측 가능성이 전제돼야 한다. 한국과의 관계에서도 상호 존중과 규범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질 때, 협력은 보다 안정적인 토대를 갖게 된다. 한국의 외교 전략 또한 보다 능동적일 필요가 있다. 한미동맹을 외교의 축으로 유지하되, 중국과의 관계를 단순한 선택의 문제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중견국 외교의 강점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조정 능력에 있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협력의 공간을 관리하는 전략적 유연성은 회피가 아니라 외교 핵심역량이다. 이번 한중 정상회담 이후의 관계는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정상 간 합의가 선언적 수준에 머물 것인지, 아니면 실무 협력과 정책적 조율로 이어질지는 지금부터의 선택에 달려 있다. 상징은 이미 만들어졌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를 더 구체화할 전략과 실행력이다. 관계 개선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다. 한중관계가 협력의 궤도로 다시 진입한다면, 이는 양국 모두의 실익에 부합할 뿐 아니라 동북아 지역의 안정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외교는 상대를 압박하는 기술이 아니라, 차이를 관리하며 공존을 설계하는 지혜다. 한중 정상회담 이후의 외교는 바로 그 지혜를 요구받고 있다. 한편, 이창호 한중교류촉진위원회 위원장은 “이번 한중 정상회담은 관계 회복의 상징을 넘어 실질 협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 중요한 출발점”이라며 “한중정상 간 소통이 재개된 만큼, 이제는 공급망 안정과 기후·보건 등 협력 가능한 분야에서 구체적 성과를 만들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어 “호상 경쟁은 관리하되, 신뢰는 행동으로 쌓아가는 전략적 적정성이 향후 한중관계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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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일보] 한중정상회담 이후..., 한중상징을 넘어 전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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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론] 성직자의 정치 참여, '양심의 자유'와 '정교분리'의 외줄타기
- [지구일보이창호 발행인] 종교와 정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동반자이자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때로는 성스러움이 세속을 구원하기도 했고, 때로는 권력의 탐욕이 신성(神性)을 오염시키기도 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다시금 불붙고 있는 성직자의 정치 참여 논란은 헌법이 보장한 '정교분리'의 원칙과 개인의 '양심 및 표현의 자유'라는 두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에 서 있다. 이를 단순한 찬반의 논리로 재단하기에 앞서, 우리는 성직자라는 특수한 신분이 갖는 도덕적 무게와 그 영향력을 냉철하게 응시해야 한다. 성직자의 정치 참여를 옹호하는 측은, 성직자 또한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임을 강조한다. 헌법 제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종교에 의해 정치적·사회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성직자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거나, 보편적 인권과 정의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광장에 나서는 것을 '종교의 정치 개입'으로만 매도할 수는 없다는 논리다. 역사의 변곡점마다 종교계가 보여준 예언자적 비판 정신은 민주화와 인권 신장에 기여한 바가 크다. 그러나 문제는 '참여의 방식'과 '정치적 중립성'의 훼손에 있다. 성직자의 말 한마디는, 시민의 사회적 무게감이 다르다. 신도들에게는 신의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영적 권위를 지니기 때문이다.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노골적으로 지지하거나, 종교적 교리를 이용해 정치적 적대감을 고취하는 행위는 종교의 본질인 화합과 사랑을 스스로 부정하는 처사다. 이는 신앙의 공동체를 이념의 전장(戰場)으로 변질시키고,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기보다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특히 한국 사회처럼 종교적 다양성이 공존하는 다종교 사회에서 특정 종교인의 편향된 정치 행보는 자칫 종교 간 갈등이나 사회적 분열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우리 헌법 제20조 제2항이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고 명시한 이유는 정치가 종교를 이용하거나, 종교가 국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비극을 막기 위함이다. 성직자가 강단에서 특정 정파의 논리를 전파하는 순간, 종교는 세속적 권력투쟁의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진정한 의미의 성직자의 정치 참여는 '정치 권력에의 편승'이 아니라 '시대적 가치의 수호'여야 한다. 특정 이념의 전사가 되기보다는, 우리 사회가 놓치고 있는 도덕적 가치와 공동체의 선(善)을 일깨우는 '사회의 빛과 소금'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되, 스스로 권력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다. 결국 성직자의 정치 참여가 정당성을 얻으려면 엄격한 자기 절제와 성찰이 전제되어야 한다. 성직자의 옷을 입고 행하는 모든 정치적 언사는 개인의 자유를 넘어 종교 전체의 신뢰와 직결된다. 종교가 정치를 정화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종교를 오염시키는 현실을 목도하며, 우리는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성직자들이 서 있는 곳은 진정 낮은 곳을 향한 헌신의 자리인가, 아니면 세속의 권력을 탐하는 탐욕의 자리인가. 성직자는 정치적 사안에 대해 침묵할 의무는 없으나, 자신의 권위가 갖는 파괴력을 직시해야 한다. 정치가 증오와 배제의 언어로 가득 찬 시대일수록, 종교는 그 너머의 화해와 통합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이 성직자에게 부여된 진정한 사회적 책무이자, 정치 참여의 한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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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론] 성직자의 정치 참여, '양심의 자유'와 '정교분리'의 외줄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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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일보] 천 년의 비단길에서 디지털 런웨이로... 중국 패션의 역사적 변천과 미래적 응시
- [지구일보 김지윤 한중문화칼럼니스트] 패션은 단순히 몸을 감싸는 천의 조합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의 이데올로기, 기술의 진보, 그리고 한 민족의 자존감이 응축된 ‘입는 역사서’다. 특히 중국 패션은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던 오색찬란한 비단에서부터, 혁명의 획일성을 상징하던 인민복을 거쳐, 이제는 전 세계 미학의 기준을 새롭게 정의하는 ‘신중국주의(New Chineseness)’에 이르기까지 극적인 파노라마를 그려왔다. 본 칼럼에서는 중국 패션의 역사적 흐름을 짚어보고, 현대 중국 패션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성을 알아본다. ◈ 역사적 흐름, 권위와 혁명, 그리고 개방의 연대기 ① 제국의 영광, 복식으로 쓴 위계의 서사 전통 시대 중국 패션은 ‘예(禮)’의 산물이었다. 한푸(漢服)로 대표되는 고대 복식은 소매의 넓이, 허리띠의 색상, 수놓아진 문양 하나하나에 엄격한 계급적 질서를 담았다. 청나라 시대의 치파오(旗袍) 역시 본래 만주족 여인들의 헐렁한 의복에서 시작되어 왕실의 권위를 상징했다. 이 시기 중국 패션의 핵심은 ‘독보적 기법’이었다. 옷감 특유의 질감으로 경외감을 만들듯, 당시의 자수와 직조 기술은 그 자체로 국가적 IP(지식재산권)였다. ② 혁명의 시대, 획일화된 정체성, 인민복(中山裝) 20세기 중반, 중국 패션은 거대한 단절을 겪는다. 쑨원이 고안하고 마오쩌둥이 상징화한 인민복은 계급을 타파하고 평등을 지향하는 혁명의 유니폼이었다. 화려함은 거세되었고, 실용성과 통제된 질서만이 남았다. 이 시기는 패션이 개인의 개성이 아닌 집단의 미션을 수행하던 시기였다. ③ 개방과 모방, 서구 미학의 유입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 중국 패션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서구의 유행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서 타인의 도상을 복제하며 상업적 성장을 이뤘으나, 작가적 주체성은 부재했다. ◈ 현대 패션의 향방, 궈차오(國潮)에서 신중식(新中式)으로 오늘날 중국 패션은 더 이상 서구의 추종자가 아니다. 현재 중국 현대 패션의 방향성은 크게 세 가지 축으로 요약된다. ① 국조(國潮, Guochao), 전통의 ‘힙’한 재해석 젊은 세대인 Z세대가 주도하는 ‘궈차오’ 열풍은 애국 소비를 넘어선 미학적 혁명이다. 이는 전통문화의 파편들을 스트릿 패션이라는 현대적 그릇에 담아내는 과정이다. 한자를 그래픽화하고, 사찰의 단청 색감을 스니커즈에 이식한다. 이는 예술경영의 ‘창조적 파괴’ 이론을 실천하는 현상으로, 낡은 전통을 가장 강력한 현대적 콘텐츠로 부활시켰다. ② 신중식(新中式), 절제와 포용의 미학 최근 트렌드는 자극적인 국조를 넘어 ‘신중식’이라는 고차원적 미학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는 치파오의 형태를 해체하여 현대적인 오버사이즈 실루엣에 녹여내거나, 도자기의 유려한 곡선을 의복의 패턴으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서구의 패션이 인체의 곡선을 드러내는 ‘강조’에 집중한다면, 신중식은 인체를 감싸고 품는 ‘여백’과 ‘흐름’에 집중한다. ③ 디지털 피지털(Phygital) 생태계 다니엘 아샴이 가상 고고학이라는 서사를 디지털 미디어로 전파하듯, 중국 패션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IT 생태계를 적극 활용한다. 가상 의류(Digital Wear), 라이브 커머스를 통한 실시간 서사 전달은 중국 패션을 단순한 제조업이 아닌 ‘디지털 문화 IP 산업’으로 격상시켰다. ◈ 미래의 방향성, 지속 가능한 철학적 패션 미래 중국 패션이 나아갈 최종 종착지는 ‘정신적 안식처로서의 옷’이다. 첫째, 지속 가능성에 대한 집착이다. 전통적인 천연 염색 기법과 재생 소재의 결합은 전 세계적인 환경 위기 속에 중국 패션이 던지는 대안적 메시지다. 둘째, 포용적 디자인이다. 패션마저 글로벌세계관을 바탕으로 나이와 체형에 상관없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형태의 의복이 주류를 이룰 것이다. 중국 패션의 역사는 권위에서 투쟁으로, 다시 모방에서 창조로 굽이쳐 왔다. 이제 중국 패션은 그릇에 흙의 결이 겹겹이 쌓여 단단해지듯, 수천 년의 시간을 겹겹이 쌓아 올려 세계라는 거대한 관객을 품으려 하고 있다. 따라서, 미래의 중국 패션은 현대인의 고단한 영혼을 따스하게 품어주는 ‘문화적 그릇’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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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일보] 천 년의 비단길에서 디지털 런웨이로... 중국 패션의 역사적 변천과 미래적 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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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한국은 춘절에, 중국 관광객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는가
- [지구일보 이강문 기자] 한국이 중국인 관광객의 주요 목적지로 일본을 제치고 선두에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다가오는 중국 춘절 연휴 기간 동안 또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중국인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여행지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분석이다. 시장 조사 기관인 중국무역데스크에 따르면, 2월 15일부터 9일간 이어지는 춘절 연휴 동안 약 23만~25만 명의 중국인 관광객이 한국을 방문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지난해보다 52% 증가한 수치로, 연휴 기간이 하루 더 늘어난 점도 영향을 미쳤다. 반면 일본을 찾는 중국인 관광객 수는 2022년에 비해 60%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엔화 약세에도 불구하고 중·일 간 정치적 긴장 관계, 그리고 한국이 중국 단체 관광객에 대해 무비자 정책을 시행한 점이 여행 수요의 방향을 바꿨다는 분석이다. 상대적으로 약세를 보이는 원화 역시 서울과 부산, 제주 등 한국의 주요 관광지를 ‘가성비 여행지’로 부각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적정한 쇼핑과 식사, 여기에 K-콘텐츠를 중심으로 한 한국 문화의 세계적 확산이 관광 매력을 끌어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준비다. 숫자로 확인되는 기대감과 달리, 현장의 체감 준비 수준은 여전히 물음표다. 팬데믹 이전 중국 단체 관광객에 크게 의존했던 관광 인프라는 상당 부분 약화됐고, 중국어 안내 인력과 결제·교통 편의성, 지역 관광지의 수용 능력 역시 충분히 회복됐다고 보기 어렵다. 단기 소비에만 초점을 맞춘 쇼핑 중심 관광이 반복될 경우 지역 경제에 남는 것은 크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이 일본을 제치고 ‘선택받은 목적지’가 된 것은 기회다. 그러나 이 기회가 일시적 반사이익에 그칠지, 지속 가능한 관광 경쟁력으로 이어질지는 정책과 현장의 준비에 달려 있다. 2026년 춘절은 시작일 뿐이다. 한국은 정말로 중국 관광객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제 그 질문에 답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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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한국은 춘절에, 중국 관광객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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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칼럼=자기계발] 비전과 실행의 함수, 기적을 만드는 행동의 메커니즘
- [지구일보]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폴 부르제의 이 말은 현대인들에게 단순하지만 강렬한 진리를 시사합니다. 우리가 가슴 속에 품은 원대한 '비전'이 단순한 공상에 머물지 않고 현실의 '기적'으로 치환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사이를 잇는 강력한 촉매제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 비전, 뇌에 새기는 미래의 설계도 비전은 단순히 "부자가 되고 싶다"거나 "유명해지고 싶다"는 막연한 욕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상태를 구체적으로 시각화하고, 그 가치를 명확히 규정하는 정신적 이정표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비전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 뇌의 '망상활성계(RAS)'를 활성화하는 작업입니다. RAS는 수많은 정보 중 우리에게 중요한 정보만을 필터링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명확한 비전을 세우는 순간, 우리 주변에 널려 있던 기회와 자원들이 비로소 유의미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운'이나 '기적'의 첫 번째 단추입니다. ● 행동, 관성을 깨는 임계점의 돌파 많은 이들이 비전을 세우는 단계에서 멈춥니다. 하지만 기적은 책상 위가 아니라 현장에서 일어납니다. 요컨대 물이 99도에서 100도가 되는 순간 끓기 시작하듯, 현실의 변화를 끌어내는 데는 반드시 '행동의 임계점'을 넘어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저항의 최소화,거창한 시작보다는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실행해야 합니다. 행동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은 뇌의 에너지를 덜 쓰게 하여 지속 가능성을 높입니다. ▪︎피드백의 루프, 행동은 곧 데이터를 생성합니다. 계획만 세울 때는 알 수 없었던 문제점과 해결책이 행동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 수정 과정이 반복될 때 비전은 더욱 견고해집니다. ● 왜 '반드시' 기적이 일어나는가? 우리가 '기적'이라 부르는 현상은 사실 축적된 노력과 우연의 일치(Serendipity)가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합니다. 비전을 갖고 행동하는 사람은 단순히 한 방향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과 연결되고 새로운 변수를 창출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확률이 '0'이지만,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존재합니다. 또 그 행동이 지속될 때, 확률은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으로 상승하며 마침내 우리가 기적이라 부르는 결과에 도달하게 됩니다. ● 지금 당신의 발끝을 보십시오 비전은 먼 하늘에 있지만, 발은 땅을 딛고 있어야 합니다. 거창한 담론에 매몰되어 오늘 할 일을 미루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적은 준비된 자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자에게 찾아오는 선물입니다. 오늘 당신이 내딛는 작은 한 걸음은 내일의 거대한 파동을 만드는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당신의 비전이 살아 숨 쉬는 행동으로 이어질 때, 세상은 당신을 돕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기적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비전과 실행이 결합한 필연적 결과입니다. ▲ 글/사진: 이창호(李昌虎) 한중교류촉진위원회 위원장 겸 국제다자외교평의회 대표(의장), 한중기자연맹 회장, 중국 곡부사범대학 겸직교수, 위해직업대학 객좌교수, 허베이미술대학 명예/종신교수, Marquis Who’s Who 등재 저자, 《새 시대를 이끄는 시진핑과 한중관계》 저자. [붙임] 이 기사가 마음에 닿으셨다면, 주변의 작은 광고 한 번 눌러 주시면 힘이 됩니다.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더 나은 기사와 정직한 보도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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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칼럼=자기계발] 비전과 실행의 함수, 기적을 만드는 행동의 메커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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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억겁의 시간 너머 맞닿은 ‘한 뿌리 다른 꽃’, 설과 춘절의 사회학
- [지구일보 이창호 eorlwk] 입춘대길(立春大吉)의 묵향이 채 가시기도 전, 동아시아의 대지는 다시 한번 거대한 이동의 물결에 요동친다. 한국의 ‘설’과 중국의 ‘춘절(春节)’. 달의 주기를 따라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이 두 명절은 유교적 문화권이라는 거대한 자장(磁場) 안에서 태동했으나, 각기 다른 역사적 토양 위에서 서로 다른 빛깔의 꽃을 피워냈다. 단순히 ‘쉬는 날’을 넘어 한 민족의 정체성과 가족 공동체의 원형을 확인하는 이 두 명절의 이면에는 어떤 문화적 기호가 숨겨져 있을까. ● 고요한 성찰의 시간, 한국의 ‘설’ 한국의 설은 ‘삼가다’라는 뜻의 ‘사리다’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새해의 첫날을 그저 들뜬 축제로 맞이하기보다, 몸가짐을 정돈하고 경거망동을 삼가며 한 해의 운수를 경건히 맞이하려는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한국 설의 핵심은 ‘수직적 결합’과 ‘내면적 위로’에 있다. 이른 아침, 정갈하게 차려낸 차례상 앞에서 조상을 기리는 마음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정신적 가교'다.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올리는 세배는 단순한 용돈 벌이가 아닌, 세대 간의 내밀한 축복이자 질서의 확인이다. 음식에서도 그 성격이 드러난다. 흰 떡국 한 그릇은 지난날의 묵은 때를 벗고 백지 위에 새로운 일기를 써 내려가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다. 한국의 설은 왁자지껄한 소음보다는 가족들이 둘러앉아 덕담을 나누는 낮은 목소리의 온기로 채워진다. 이는 농경 사회의 공동체 의식을 유지하면서도 개별 가문의 가풍을 중시했던 한국 특유의 유교 문화가 투영된 결과다. ● 거대한 생명력의 폭발, 중국의 ‘춘절’ 반면 중국의 춘절은 ‘수평적 확장’과 ‘역동적 환희’의 무대다. 고대 전설 속 괴물 ‘년(年)’을 쫓아내기 위해 붉은 종이를 붙이고 폭죽을 터뜨리던 풍습에서 기원한 만큼, 춘절의 기운은 강렬하고 뜨겁다. 중국인들에게 춘절은 겨울의 끝과 봄의 시작을 알리는 거대한 선언이다. 집집마다 붙이는 ‘춘련(春联)’과 거리를 수놓는 홍등(紅燈)은 복(福)이 들어오길 바라는 적극적인 염원의 산물이다. 한국의 설이 차분한 묵조(默照)의 시간이라면, 중국의 춘절은 온 세상이 붉게 타오르는 축제의 시간이다. 특히 춘절 음식인 ‘교자(饺子)’는 그 형태가 옛 화폐인 원보(元寶)를 닮아 부(富)를 기원하는 세속적이고도 솔직한 욕망을 담고 있다. 가족이 모여 만두를 빚으며 밤을 지새우는 ‘수세(守歲)’ 풍습은 거대한 대륙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확인하고 서로의 생존을 축하하는 강인한 생명력의 표출이기도 하다. ● 자본주의와 만난 전통, 그리고 변치 않는 가치 21세기에 들어서며 '설과 춘절'은 거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한국의 ‘명절 증후군’과 중국의 ‘춘운(春運, 춘절 대이동)’은 현대 사회가 전통 명절에 부과한 피로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작금 핵가족화를 넘어 1인 가구가 보편화된 시대, "가족이 반드시 모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사회적 화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설과 춘절을 기다리는 이유는 명확하다. 속도와 효율만이 강조되는 무한 경쟁의 궤도에서 잠시 내려와, 나의 뿌리를 확인하고 타인(가족)의 안부를 묻는 '인간적인 시간'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떡국 한 그릇과 중국의 교자 한 접시는 결국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다시 시작할 기회가 있다"는 위로 말이다. 설과 춘절은 단순한 역법상의 날짜가 아니다. 그것은 '억겁의 세월' 동안 동아시아인의 DNA에 각인된 '회귀(回歸)'의 본능이며, 차가운 겨울을 뚫고 올라오는 봄의 전령사다. 형상은 다르되 본질은 하나인 이 두 명절을 통해, 우리는 다시금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 글/사진: 이창호(李昌虎) 한중교류촉진위원회 위원장 겸 국제다자외교평의회 대표(의장), 한중기자연맹 회장, 중국 곡부사범대학 겸직교수, 위해직업대학 객좌교수, 허베이미술대학 명예/종신교수, Marquis Who’s Who 등재 저자, 《새 시대를 이끄는 시진핑과 한중관계》 저자. [붙임] 이 기사가 마음에 닿으셨다면, 주변의 작은 광고 한 번 눌러 주시면 힘이 됩니다.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더 나은 기사와 정직한 보도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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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昌虎 政論] 이준석-전한길의 ‘맞장 토론’, 음모론의 유령을 걷어내는 계기 돼야...,
- [지구일보 이창호 대기자]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 제도를 향한 근거 없는 불신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개혁신당 이준석 국회의원과 한국사 강사 전한길(본명 전유관)씨가 ‘부정선거’ 의혹을 두고 공개 토론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이 의원은 "부정선거론자들의 추태를 끝내겠다"며 강한 의지를 피력했고, 전 씨 또한 토론에 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를 단순히 정치인과 유명 강사 사이의 ‘설전’으로 치부하기에는, 우리 사회가 치러온 사회적 비용과 민주주의의 훼손 정도가 너무나 깊다. ■ 반복되는 ‘부정선거’ 괴담, 민주주의를 갉아먹는 독소 선거가 끝날 때마다 반복되는 부정선거 음모론은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병폐다. 통계적 수치의 미세한 차이를 근거로 들거나, 투표지 분류기 조작설 등 이미 수차례 검증을 통해 허구로 판명된 주장들이 유령처럼 배회한다. 이러한 음모론의 위험성은 단순히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국민들이 투표라는 신성한 행위를 통해 표출한 민의를 부정하게 만들고, 국가 기관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을 조장하며, 국민 공동체의 통합을 저해한다. 또 이번 논란은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통해 확산되었다는 점에서 우려한다. 역사를 가르치는 강사가 명확한 근거 없이 선거 시스템에 의구심을 표하는 것은 자칫 유권자들에게 왜곡된 민주주의관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 의원이 "추태를 끝내겠다"고 일갈한 배경에는, 더 이상 과학적 근거 없는 주장이 정치적 자양분으로 소비되는 상황을 방치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 깔려 있다. ■ 논리가 아닌 신념의 영역으로 도피하는 음모론자들 부정선거론자들의 주된 논리는 대개 ‘내가 믿고 싶은 것’에 끼워 맞춘 단편적인 정보들의 조합이다. 대법원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수차례 재검표와 기술적 검증을 거쳐 "조작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음에도, 이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확증 편향에 갇혀 있다. ▪︎검증된 사실의 부정 대법원은 이미 지난 총선 관련 선거무효 소송에서 부정선거의 증거가 없음을 명확히 판결했다. ▪︎디지털 문해력의 부재 복잡한 선거 관리 프로세스를 이해하지 못한 채, 단순한 통계적 우연을 조작의 증거로 둔갑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 정치적 도구화 극단적인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해 음모론을 동력으로 삼는 일부 정치 세력의 책임 또한 가볍지 않다. ■ ‘맞장 토론’이 단순한 구경거리가 되지 않으려면 이번 토론은 감정적인 비난이 아닌, 철저히 데이터와 논리에 기반한 검증의 장이 되어야 한다. 이준석 의원은 그간 부정선거론자들의 허구성을 수학적·논리적으로 반박해온 대표적인 정치인이다. 전한길 강사 역시 본인이 제기한 의구심이 합리적 추론인지, 아니면 막연한 심증인지를 대중 앞에서 기필코 증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 단순히 누가 더 말을 잘하느냐를 가리는 승패의 장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이번 토론을 통해 우리 사회가 얻어야 할 결론은 분명하다. "민주주의 시스템은 음모론보다 견고하며, 근거 없는 불신은 공동체의 적"이라는 합의다. 정치권 또한 이번 사안을 구경하듯 방관할 것이 아니라, 선거 제도의 투명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허위 사실 유포에 대한 엄중한 사회적 경종을 울려야 한다. ■ 음모론의 시대, 이성으로의 회귀를 기대한다 민주주의는 서로를 향한 ‘신뢰’라는 토양 위에서만 꽃을 피울 수 있다. 선거 결과가 내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판 자체를 부정하는 행태는 민주주의의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이번 이준석 의원과 전한길 강사의 토론이 우리 사회에 깊게 뿌리 내린 '음모론의 독소'를 제거하고, 합리적 이성과 과학적 토론이 승리하는 변곡점이 되기를 희망한다. 진실은 복잡한 수식 속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직시'하려는 용기 속에 있다. 더 이상 ‘부정선거’라는 낡은 레코드가 민주주의의 전진을 가로막게 두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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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昌虎 政論] 이준석-전한길의 ‘맞장 토론’, 음모론의 유령을 걷어내는 계기 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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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일보}평론가가 추천하는 명수필(7) 송명화 ‘소멸에 대한 애도와 기억의 기록
- |박소현 제2수필집 『내 안의 윤슬이 빛날 때』 [평론가가 추천하는 명수필(7) 송명화 ‘소멸에 대한 애도와 기억의 기록’ 박소현의 ‘해 질 무렵 송명화/ 문학평론가 예술은 기억이 아니라 생성이다. 문학은 기억을 말하는 곳이 아니라 기억이 머무는 장소다. 닫힌 장소가 아니라 반복적으로 드나들며 기억을 소환하고 확장하며 재구성할 수 있는 열린 장소다. 이런 면에서 박소현의 수필 <해 질 무렵>은 소멸해가는 것에 대한 애도와 기록의 비문이라 할 만하다. 이 수필은 1인칭 화자인 작가적 삶의 주름에 층층이 접혀있는 기억들을 펼치며 과거의 사물, 사건, 사람을 소환한다. 그것은 이푸 투안이 제시한 토포필리아에 기반한 체험들이며, 시간을 통과했지만 여전히 기억 속의 한 자리를 차지하거나 현재를 꾸리는 행위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들이다. 작가는 경남 남해의 작은 바닷가 마을 출신이다. 학창시절에 떠나왔던 고향을 찾아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외삼촌 집 마루에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외삼촌 내외가 죽고 집은 비었다. 인구가 줄어든 마을은 쇠락한 상태다. 이 작품에서 빈집은 정동과 정서를 발생시키는 장소적 조건, 새로운 해석과 감응을 낳는 살아있는 장으로 작동한다. 여기서 토포필리아는 그저 고향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라기보다 얼마나 많은 체험이 중첩되어 있는지를 전제하는 체감의 문제로 읽을 수 있다. 마당과 항아리들만이 지키고 있는 빈집은 고유의 기능을 잃었고, 결국 소멸로 가는 과정에 있다. 멸치잡이 산업으로 분주하던 선창가 옆 자갈밭도 모두 사라졌다. 살아있던 방식이 더 이상 재생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구조물들을 작가는 수필 속에 배치한다. 좋은 작품은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새로운 감응과 의미를 낳는 또 다른 잠재성의 출발점이 된다. ‘해 질 무렵’은 수필의 마지막 문장 ‘붉디붉은 노을이 소리 없이 내려앉고 있다’에만 거론되는 시간적 배경이지만 쇠락하는 것, 사라지는 것을 함의하는 멋진 제목이다. 이 제목이 가지는 분위기는 이 수필 전체의 분위기와 통일성있게 어울리며, 작가의 깊이 있는 사유와, 예화를 제시하는 간결한 문장들과도 맥을 같이 한다. 또한 구조의 단단함은 작가의 글쓰기 내공을 짐작하게 한다. 소설적 구성으로 개인서사와 지역사회 서사를 교차하고, 현재의 서사와 과거의 회상을 교직하였다. 외삼촌과 외숙모의 투병과 죽음은 이 작품에서 작가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공동체 쇠락의 증거로 쓰였다. 이는 마을의 세대교체를 기대하게 하는 사건이다. 바다를 생업의 터로 삼아 고군분투하던 어른들은 세상을 떠나고, 자식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도시로 떠났다. 동네에는 소수의 토박이 독거노인들이 여생을 붙잡고 있다. 학교는 폐교 위기에 처하고, 인구절벽과 고령화로 마을이 문을 닫는 지경까지 상상한다. 작가는 세대교체, 떠나는 자로부터 배턴을 이어받아야 할 자들의 부재를 예리하게 지목한다. 사라져가는 풍습도 애도의 대상이다. 동제는 전통으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세대가 더 이상 이어받지 않기로 한 의식이다. 무당의 신들린 춤과 징 소리, 당산나무 아래서 벌이는 굿판에는 바닷가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과 애환이 깃들었지만 마을에는 이제 동제의 효험을 바랄 사건이 별로 없다. 조난예방이나 만선, 손의 보존이나 마을의 번성 같은 것을 빌 사람도 빌어야 할 이유까지도 사라져 간다. 청산가리로 꿩잡이라는 공동체의 놀이 또한 기억의 흔적으로만 남았다. 들뢰즈는 예술을 지각과 감각의 블록이라고 했다. “누가 느끼는가”가 아니라 “느낌 그 자체가 작품 속에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작가는 기다림을 말하지 않고 배치한다. ‘기다림’을 공간에 깔린 정동의 상태로 둔다. 이는 도입부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긴 목을 늘어뜨린 채’ 졸고 있는 빈집, 결말부의 ‘능소화가 앞다투어 피어날 것이다. 능소화의 꽃말이 기다림’으로 수미상관적으로 호응됨으로써 주제의 통일성과 구조의 안정성을 견인한다. 들뢰즈에게 문학은 감응의 기계다. 사람과 사건과 사물이 점차 사라져가는 지역사회의 쇠락을 설명으로 이해시키기보다 기억해야 할 것으로 느끼게 하는 정동적 배치가 이 작품을 읽는 쾌미다. 우리는 작품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감응한다. “누구든지 고향을 찾을 일 있으면 우리 집에서 자고 가세요.”라는 외사촌의 제안으로 비감함을 넘어설 미래를 제안하고 있음 또한 이 수필의 남다른 미학이다. 수필 <해 질 무렵>은 잔잔한 톤으로 우리가 겪는 사회문제에 대해 독자들의 감응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하였다. 작가는 상실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상실이 아무 의미도 없이 지나도록 두지 않으려 한다. 안달하지도, 한탄하지도 않고 장소애를 바탕으로 삶의 흔적을 기억의 층위에 저장하여 순간의 지각과 감각을 굳혀서 덩어리로 만든느 데 성공했다. 쇠락해가는 시골의 정보를 주는 게 아니라 어떤 온기와 고요의 감각덩어리를 만든 것이다. 따라서 이 수필은 애도와 기록의 문학적 재구성, 사라짐을 막지는 못하지만 사라짐을 잊히지 않게 하는 아카이브로서의 가치가 문예미학적으로 구현된 본격수필이라 하겠다. ■송명화 주요 약력 △수필가, 문학평론가, 문학언어치료학 박사 △경남 남해 출신 △전남일보 신춘문예 수필(2005) △에세이문예 문학평론(2010) △전 국제PEN한국본부 부산지역위원회 회장, 전 한국본격수필비평가협회 회장 △계간 [에세이문예] 주간, 사)부산문인협회 부이사장, 부산교대 평생교육원 문예창작반 지도교수 △수필집 <순장소녀>(세종도서), <꽃은 소리 내어 웃지 않는다>(문학나눔), <나무의 응시 풀의 주름>(아르코창작기금) 등 6권 △이론서 <본격수필 창작이론과 적용> △김만중문학상(수필), 우하박문하문학상(평론), 한국에세이평론상(평론), 평사리문학대상(수필), 신격호샤롯데문학상(수필) 등 수상 ■박소현 <해 질 무렵> 인적 없는 마당에 흐드러지게 핀 영산홍 무더기가 애잔하다. 병풍처럼 집을 감싸고 있던 뒤란의 대나무 숲도, 도시로 나간 자식들 집으로 퍼 나르던 된장, 고추장 항아리들도 예전 그대로다. 오랜 세월, 세심한 손길로 어루만져졌을 저것들은 주인의 부재를 알기나 할까? 어린 시절 내 마음속에 따스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젊디젊은 막내 외삼촌과 외숙모는 지금 어디쯤에서 지친 육신을 누이고 있을까? 나는 주인 없는 빈집 마루에 걸터앉아 켜켜이 쌓인 이 집의 전설들을 떠올리고 있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 금빛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주인 잃은 집 한 채가 무심히 졸고 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긴 목을 늘어뜨린 채…. 2년 전, 앙상한 팔에 링거를 꽂은 채 외숙모가 핏기 없는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우리 집 지척에 있는 종합병원 암 병동이었다. 코에는 호흡 보조기를 낀 채 잠인지 실신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미동이 없었다. 외숙모는 거미줄 같은 희망을 안고 천리 길을 달려 의료 시설이 좋다는 서울까지 왔을 것이다. 외숙모의 얼굴에선 똬리를 튼 죽음의 그림자가 일렁거렸고, 병실엔 깊은 정적이 흘렀다. 창밖에는 봄꽃들이 힘차게 새 움을 틔우고 있던 3월이었다. “니 결혼식 날 보고 처음이구나.” 한참 시간이 지난 후 간신히 눈을 뜬 외숙모가 내 손을 쓰다듬었다. 물기라곤 없는 까칠한 손이었다. 30여 년 만이었다. 얼굴이 참 고왔던 40대 외숙모는 70 중반의 병든 노인이 되어 나와 마주했다. 육체와 정신의 거리는 지구의 끝과 끝처럼 멀기만 했다. 몸은 태풍 앞의 오막살이처럼 위태위태해 보였으나 정신은 명징해 오래전 일들을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해내고 있었다. 외삼촌이 폐암에 걸리자 남편을 살려보겠다는 일념으로 정신없이 간호를 하느라 정작 당신이 중병에 걸린 줄도 몰랐다고 했다. 눈가엔 촉촉이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외숙모는 결국 내가 싸간 음식들을 하나도 입에 대지 못했다. 저 멀리 바다 한가운데 죽방렴 옆에는 조그만 배 한 척이 한가로이 떠 있다. 풍어로 한껏 부풀어 올랐던 어부들의 분주했던 손길과 그 많던 멸치잡이 배들을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대낮인데도 마을엔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물에 걸린 멸치들을 털어 큰 가마솥에 삶아서 말리던 선창가 옆 자갈밭도 보이지 않는다. 간간히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흘러간 삶의 흔적들만 살며시 고개를 들고 있을 뿐…. 노동에 지쳐 벌컥벌컥 막걸리를 들이켜던 어부들의 불콰한 얼굴도 빛바랜 사진처럼 옛 추억이 되어버렸다. 외숙모는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화장되어 한 줌 가루로 남았다가 두 달 후 돌아가신 외삼촌과 함께 국립묘지에 묻혔다. 그 후 이 집은 빈집이 되고 말았다.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던 초여름이었다. 엄마의 아홉 형제 중 살아 있던 유일한 피붙이였던 막내 외삼촌을 이 마을에서만 80년을 살았다. 평생을 허심, 무심 욕심 없이 살다 간 삶이었다. 나도 어릴 땐 이 동네에 살았다. 100여 호 가까운 가구가 올망졸망 머리를 맞대고 살던 마을, 아침이면 200명도 넘는 아이들이 왁자지껄 떼를 지어 학교를 가던 곳, 나와 같은 학년의 친구들만도 32명이었던 큰 마을이었다. 누구 집 큰아들이 행정고시에 붙었다거나, 누구네 딸이 명문 여고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아이들은 순식간에 제 꿈의 높이를 한 단계씩 올렸다. 그러곤 저마다의 꿈을 좇아 도시로, 도시로 떠나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외삼촌과 외숙모가 돌아가시던 그해에 이 마을에는 일곱 명의 독거노인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숫자만큼 마을엔 빈집도 늘었을 것이다. 지척에 있는 초등학교와 중, 고등학교도 전교생이 100명도 채 안 돼 폐교 위기에 처했다. 인구 절벽과 고령화로 30년 후면 30%가 넘는 지방자치단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몇십 년 후 이곳도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 마을이 되는 건 아닐까. 정초가 되면 바닷가 옆 당산나무 아래서는 한바탕 굿판이 벌어졌다. 동제洞祭였다. 당산나무 가지엔 형형색색의 끈들이 묶여 바람에 나부끼었고, 무당의 신들린 춤과 징 소리는 온 마을과 바다를 뒤흔들고 있었다. 무당의 입에서는 봇물처럼 사설이 쏟아져 나왔다. 마을 사람들도 모두가 당산나무 아래에 모여 두 손을 모으고 연신 허리를 숙이며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 굿판에는 바닷가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과 애환이 깃들어 있었다. 축제였다. 먹을거리에 굶주린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저 신이 났다. 동제 뒤에 얻어먹을 고사떡이나 과일들을 생각하며 풍선처럼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모두가 가난했던 날들이었다. 겨울이면 마을 오빠들은 꿩 잡이에 나섰다. 메주콩에 구멍을 뚫어 그 속에 청산가리를 넣고는 촛농으로 구멍을 막았다. 그렇게 만든 미끼를 꿩이 잘 다닐 만한 곳에 뿌려놓고는 다음날 그걸 먹고 죽은 꿩들을 잡아서 내장을 걷어내고 국을 끓이거나 백숙을 해 먹기도 했다. 그렇게 위험천만한 일을 하면서도 아무도 그게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랬다. 꿩을 먹고 죽었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걸 보면 동제의 효험으로 천지신명이 도우신 건지? 슬프도록 순수했던 시절이었다. “친척들 누구든지 고향 올 일 있으면 우리 집에서 자고 가세요.” 내 유년의 기억들이 봄날의 벚꽃 이파리만큼이나 무성한 이곳. 도시에 살면서도 수시로 찾아 와 부지런히 빈집을 보살피는 동갑내기 외사촌 덕분에 아직도 이 집에서 사람의 온기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쏴아~. 파도가 갈 길을 재촉하고 있다. 이 봄이 지나면 마당 넓은 이 집에도 수국과 능소화가 앞다투어 피어날 것이다. 능소화 꽃말이 기다림이라 했던가. 붉디붉은 저녁노을이 소리 없이 내려앉고 있다. <수필집『내 안의 윤슬이 빛날 때』> ■박소현 2002년 『책과 인생』등단.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아르코문학창작기금 2회 수혜(2008년, 2020년). 경북문화체험전국수필대전 대상, 계간문예수필문학상, 권대근문학상 등 수상. 국제PEN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한국산문작가협회, 철학수필가협회 회원. 수필집 『별들은 나이를 세지 않는다』『내 안의 윤슬이 빛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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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일보}평론가가 추천하는 명수필(7) 송명화 ‘소멸에 대한 애도와 기억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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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시선] 인공지능은 답하고 인간은 묻는다… ‘질문의 품격’이 생존이다
- [지구일보 이창호 대표칼럼니스트]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지능을 추월했다는 경고음이 도처에서 들려오는 시대다. 기술은 소통의 속도를 광속으로 높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삶의 밀도와 사유의 깊이는 그 어느 때보다 얄팍해졌다. 모든 정보가 손끝에서 정답의 형태로 제시되는 오늘날, 역설적으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기술이 인간을 대체할 때, 인간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류 최후의 보루는 ‘질문을 던지는 능력’에 있다. 지식의 양으로는 결코 기계를 이길 수 없지만, 지혜의 정수인 질문을 창조하는 능력은 여전히 인간 고유의 영역이다. 이제 정답을 찾아내는 숙련도는 경쟁력을 잃었다. 질문자의 수준이 답의 수준을 결정하며, 기계가 대답할 수 없는 모호함과 본질의 경계에서 날카로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미래의 핵심 역량이다. ◆ 마침표의 안락함을 버리고 물음표의 불편함을 택하라 성장의 정체는 언어에서 시작된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일수록 우리 대화에는 ‘당연히’, ‘원래’ 같은 단정적인 마침표가 늘어난다. 호기심의 물음표가 사라진 자리는 고정관념이 채운다. 하지만 진정한 혁신은 익숙한 사유 체계를 흔드는 불편한 질문에서 싹튼다. 관련 없어 보이는 두 세계를 연결하고 한계를 돌파하려는 의지는 “왜 안 되는가?”라는 단 한 줄의 문장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좋은 질문은 안락한 책상이 아니라 낯선 환경과의 충돌에서 나온다. 가보지 않은 길을 걷고, 읽어보지 않은 책을 펼치며, 타자의 사유 체계에 접속할 때 비로소 ‘나만의 관점’이 형성된다. 남이 요약해 준 지식을 섭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메시지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집요하게 되묻는 주체적 사유가 필요하다. 어제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기보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더 나은 실수’를 하겠다는 태도가 질문의 질을 높인다. ◆ 지시하는 리더에서 질문하는 리더로 사회적 관계와 리더십의 패러다임도 변해야 한다. 과거의 리더가 정답을 지시하고 명령하는 존재였다면, 미래의 리더는 질문을 통해 구성원의 잠재력을 깨우는 존재다. 실패한 이를 질책하기보다 “이 경험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가?”라고 묻는 리더십이 조직을 유연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제 완벽을 기하며 계획만 세우는 ‘완벽주의자’가 아니라, 현장에서 부딪히며 지혜를 얻는 ‘경험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발명은 천재의 영역일지 몰라도, 어제와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은 성실하게 묻고 관찰하는 이의 몫이다. 실패가 없다는 것은 현실에 안주했다는 방증일 뿐이다.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꾸는 힘 역시 “어떻게 다시 시작할 것인가”라는 희망 섞인 질문에서 비롯된다. ◆ 자기다움, 가장 독창적인 질문의 결과물 결국 모든 질문의 종착지는‘자기다운 삶’이다. 남들처럼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현대인의 불행은 스스로에게 질문하기를 멈췄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차별화된 독특함에서 나오고, 그 독특함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성찰적 물음에서 완성된다. 주어진 목표를 기계적으로 달성하는 ‘기술적 숙련가’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끊임없이 묻고 실천하는 ‘성찰적 실천가’로 변신해야 한다. 인류가 잃어가는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을 되찾는 것. 그것이 AI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품격이자 진정한 경쟁력이다. 정답을 찾는 이가 아니라, 세상을 향해 쉼 없이 질문을 던지는 자만이 미래라는 미지의 지도를 그려갈 수 있다. [붙임] 이 기사가 마음에 닿으셨다면, 주변의 작은 광고 한 번 눌러 주시면 힘이 됩니다.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더 나은 기사와 정직한 보도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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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시선] 인공지능은 답하고 인간은 묻는다… ‘질문의 품격’이 생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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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일보] 질문 능력이 곧 경쟁력인 이유
- [지구이창호 소통전문가] 시장은 더 이상 정답을 빨리 찾는 사람에게 보상을 주지 않는다. 이미 알려진 답은 값이 싸지고, 복제는 순식간에 이뤄진다. 오늘날 경쟁력을 가르는 기준은‘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묻느냐’에 있다. 질문의 수준이 사고의 깊이를 결정하고, 그 깊이가 곧 수익의 구조를 바꾼다. 성공한 비즈니스의 출발점을 거슬러 올라가면, 대부분 하나의 질문에 닿는다. “이걸 더 싸게 만들 수 있을까?”가 아니라 “사람들은 왜 불편함을 참고 있을까?”, “고객은 진짜로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가?” 같은 질문이다. 창의적 사고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남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전제를 의심하는 능력에 가깝다. 질문을 잘하는 사람은 문제를 다르게 정의한다. 같은 시장을 보더라도 ‘경쟁이 치열하다’고 말하는 사람과 ‘아직 충족되지 않은 틈이 있다’고 묻는 사람의 결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돈은 노력의 양보다 문제 설정의 정확도에 반응한다. 그래서 질문은 곧 전략이 된다. 교육 현장과 조직 문화에서도 질문은 종종 불편한 존재다. 질문은 속도를 늦추고, 기존 질서를 흔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문이 사라진 조직은 곧 혁신을 잃는다. 상명하달식 보고는 유지될지 몰라도, 새로운 수익 모델은 태어나기 어렵다.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구조에서는 창의성도, 성장도 지속되기 힘들다. 개인에게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더 배워야 할까”보다 “이 배움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가”를 묻는 순간, 공부는 비용이 아니라 투자로 바뀐다. 질문이 명확해질수록 선택은 줄어들고, 집중은 깊어진다. 이것이 질문이 돈이 되는 이유다. 결국 질문 능력은 타고나는 재능이 아니라 훈련의 결과다. 매일 접하는 정보 앞에서 한 번 더 묻는 습관, 당연함에 잠시 멈춰 서는 용기다. 그리고 불편한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 태도. 이 작은 차이가 장기적으로는 경쟁력의 격차를 만든다. 답은 누구나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질문은 언제나 희소하다. 그리고 시장은 늘 희소한 것에 값을 매긴다. 글/사진 : 이창호 이창호스피치리더십연구소 대표, 대한명인(연설학), 스피치마스터의 생산적 말하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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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일보] 질문 능력이 곧 경쟁력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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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윤의 예술경영 칼럼] 예술가여, '사업'이 아닌 '세계관'을 확장하라, 예술 창업의 철학적 패러다임 전환
- [지구일보 김지윤 한중문화칼럼니스트] 전통적으로 예술과 경영은 물과 기름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예술은 '순수한 정신의 산물'로, 경영은 '차디찬 자본의 논리'로 치부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대 미술 생태계에서 예술가에게 창업은 단순히 생계를 위한 보조 수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예술적 철학을 사회라는 거대한 캔버스에 투사하는 확장된 창작 활동'입니다. 예술 전공자들이 창업을 기술적 절차가 아닌 철학적 확장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와 그 구체적인 전략적 방안을 제시합니다. ◈ 창업을 '철학적 확장'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 작가적 정체성(Identity)의 보존과 강화입니다. 특히 기술적 관점, 즉 '무엇을 팔 것인가'에만 매몰된 창업은 시장의 유행에 휩쓸리기 쉽습니다. 이는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파편화하고 결국 '창작의 고갈'을 초래합니다. 반면, 창업을 자신의 철학적 결과물로 인식할 때,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 됩니다. 이 경우 상업적 활동은 예술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새로운 매체가 되어 작가의 세계관을 더욱 공고히 합니다. 관객과의 '철학적 공명'을 통한 팬덤 형성입니다. 현대 소비자는 상품의 기능보다 브랜드가 가진 '서사(Narrative)'와 '철학'에 반응합니다. 미술 전공자가 자신의 미학적 가치를 비즈니스 언어로 번역하여 제안할 때, 관객은 단순한 구매자를 넘어 작가의 철학에 동참하는 '후원자'이자 '팬'이 됩니다. 이러한 정서적 유대는 기술적 마케팅이 결코 따라올 수 없는 지속 가능한 경쟁력이 됩니다. 예술적 실천의 사회적 영토 확장입니다. 캔버스나 조각대 앞에 머물던 예술가의 사유가 경영이라는 도구를 만나면 전시장을 넘어 도시의 거리, 사람들의 일상, 사회적 문제 해결의 현장으로 뻗어 나갑니다. 창업은 예술가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을 혁신하고,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현실 세계에서 구현하는 가장 능동적인 실천입니다. ◈ 철학적 확장을 위한 전략적 방안 예술경영 컨설팅의 관점에서 미술 전공자들이 취해야 할 전략은 '가치(Value)'에서 출발하여 '시스템(System)'으로 귀결되어야 합니다. 첫 번째, '가치 제안(Value Proposition)'의 미학적 재정의 가장 먼저 수행해야 할 작업은 자신의 작업을 '제품'이 아닌 '가치의 경험'으로 재정의하는 것입니다. • 전략, 비즈니스 모델 캔버스의 중심에 '작가 선언문(Artist Statement)'을 배치하십시오. "나는 회화를 판매한다"가 아니라 "나는 바쁜 현대인에게 0.1mm의 정밀함이 주는 평온의 미학을 제공한다"는 식의 가치 제안이 필요합니다. 이 철학적 뿌리가 단단할 때 제품은 그림에서 오브제, 서비스, 공간 기획으로 무한히 변주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관계의 미학'을 적용한 서비스 디자인 현대 미술의 '관계적 미학(Relational Aesthetics)' 이론을 경영 프로세스에 도입하십시오. • 전략, 단순히 완성된 결과물을 판매하는 시스템을 넘어, 관객이 작가의 사유 방식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설계해야 합니다. 제작 과정의 서사를 공유하는 멤버십 모델, 작가의 철학을 기반으로 한 커뮤니티형 워크숍 등이 그 예입니다. 이는 경영을 '거래'가 아닌 '관계의 창출'로 인식하는 철학적 접근입니다. 세 번째, STP 전략: '철학적 공명층'의 세분화와 타겟팅 모두를 만족시키려는 노력은 예술적 색채를 흐리게 합니다. • 전략, * Segmentation, 인구통계학적 구분이 아닌, 나의 미학적 메시지에 반응할 '정서적/철학적 집단'을 세분화하십시오. • Targeting,그중 나의 예술적 위로 혹은 질문이 가장 절실한 타겟을 선정하십시오. • Positioning, 관객의 머릿속에 "이 브랜드는 나의 실존적 고민을 예술적으로 해결해 주는 유일한 창구"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네 번째, '린 스타트업(Lean Startup)'을 통한 예술적 실험 창업의 과정을 실험 미술의 연장선으로 이해하고 접근하십시오. • 전략: 거창한 사업 자금과 대규모 시설에 집착하기보다, 자신의 철학적 아이템을 최소 단위로 구현하여 단기간에 제품을 만들어 시장의 반응을 다음 제품에 반영하ㅇ는 것을 반복하시고 살피십시오. SNS를 통한 작업 일지 공유, 팝업 전시 등을 통해 대중의 피드백을 수집하고, 이를 다시 자신의 예술 철학과 버무려 비즈니스 모델을 정교화해 나가는 '예술적 피드백 루프'를 구축해야 합니다. ◈ 창의성을 경영하는 혁신가로서의 예술가 정부가 1인 창업을 지원하는 이 시점은 예술가들에게 위기가 아닌 기회입니다. 경영은 예술의 순수성을 해치는 독이 아니라, 예술이 사회라는 척박한 땅에서 시들지 않고 꽃피울 수 있게 돕는 '양분'입니다. 미술 전공자 여러분, 여러분의 창의성을 골방에 가두지 마십시오. 경영이라는 캔버스 위에 여러분의 철학을 그리십시오. 기술적 절차는 전문가에게 맡기거나 학습하면 되지만, 여러분이 가진 고유한 '철학적 씨앗'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세계관을 비즈니스로 확장하는 순간, 여러분은 단순한 예술가를 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문화 혁신가(Cultural Entrepreneur)'가 될 것입니다. [붙임] 이 기사가 마음에 닿으셨다면, 주변의 작은 광고 한 번 눌러 주시면 힘이 됩니다.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더 나은 기사와 정직한 보도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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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윤의 예술경영 칼럼] 예술가여, '사업'이 아닌 '세계관'을 확장하라, 예술 창업의 철학적 패러다임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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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칼럼] 한중 관계의 새로운 변곡점, 실질적 신뢰와 전략적 가교의 시대로
- [지구일보 이창호 대표 칼럼니스트] 한중 수교 이후 지난 수십 년간 양국 관계는 경제적 상호의존이라는 거대한 파고를 타고 발전해 왔다. 하지만 최근의 국제 정세는 단순한 경제 협력을 넘어선, 보다 깊이 있고 다층적인 신뢰의 회복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한중 정상회담은 양국이 쌓아온 역사적 유대와 공통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동시에, 산적한 글로벌 현안 속에서 ‘지속 가능한 파트너십’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대한 이정표를 제시했다. ◇ 경제와 기술을 넘어선 '가치와 신뢰'의 복원 이번 정상회담의 가장 큰 성과는 양국이 서로를 향한 ‘신뢰의 공고화’를 대내외에 천명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한중 관계는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부침을 겪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논의를 통해 양국은 일시적인 이해관계를 넘어,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공유하는 전략적 동반자임을 명확히 했다. 특히 무역과 연계성 분야에서의 논의는 고무적이다.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 속에서 한중 양국은 배타적 경쟁보다는 상호 보완적인 협력 모델을 구축해야 할 시점에 직면해 있다. 첨단 산업에서의 기술 협력과 안정적인 자원 공급망 확보는 양국 경제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이를 위해 장벽의 완화와 장벽 해소를 위한 실무적 논의를 가속화하고, 물류 및 디지털 연계성을 강화하는 것은 양국 경제를 하나로 묶는 강력한 접착제가 될 것이다. ◇ 교육과 문화, '인적 교류'가 만드는 보이지 않는 가교 한중 간의 관계를 지탱하는 가장 근본적인 힘은 결국 '사람'에서 나온다. 이번 정상 회담에서 강조된 경제, 문화, 인적 교류의 확대는 양국 국민 간의 정서적 거리를 좁히는 핵심 동력이 될 것이다. ▪ 미래 세대의 교류 확대 양국 간의 공동 연구와 학생 교환 프로그램 활성화는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이 서로를 편견 없이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 문화 콘텐츠의 상호 개방 K-컬처와 중화권 문화가 자유롭게 소통할 때, 양국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 문화를 선도하는 공동의 플랫폼을 구축할 수 있다. ▪ 민간소통의 활성화 관광 및 전문 인력의 이동을 가로막는 제도적 문턱을 낮춤으로써, 실질적인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소프트 파워’의 결합은 갈등 상황에서도 관계를 지탱해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이다. 이는 곧 양국 관계가 한층 더 도약하는 ‘새로운 단계’의 밑거름이 될 것. ◇ 동북아 평화와 공동 번영을 향한 전략적 행보 한중 양국은 지리적으로 뗄 수 없는 이웃일 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안정을 책임지는 핵심 축이다. 양국이 구축하고자 하는 ‘더 강한 가교’는 단순히 두 나라만을 연결하는 통로가 아니다. 이는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잇고, 분단된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며, 지역 내 군비 경쟁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전략적 평화의 가교를 의미한다. 지역의 조화로운 발전은 한 국가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기후 위기 대응, 보건 안보, 테러 방지 등 국경을 초월한 난제 앞에서 한중 양국은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 이러한 공동의 실천이 축적될 때 비로소 ‘공동의 번영’이라는 이상은 현실이 될 수 있다. 결국, 이번 한중정상회담을 통해 확인된 양국의 의지는 '말'보다 '실천'에 그 무게 중심이 실려야 한다. 과거의 성과에 안주하지 않고, 변화하는 시대정신에 발맞춰 관계를 재정의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한중 관계가 갈등과 대립의 역사를 뒤로하고, 상생과 조화의 시대로 나아가는 것은 양국 국민의 염원이자 시대적 소명이다. 이제 우리는 한중 관계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 가교 위에서 양국이 함께 걸어갈 길은 더욱 단단하고 넓어야 하며, 그 끝에는 동북아시아의 평화로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확신한다. [붙임] 이 기사가 마음에 닿으셨다면, 주변의 작은 광고 한 번 눌러 주시면 힘이 됩니다.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더 나은 기사와 정직한 보도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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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칼럼] 한중 관계의 새로운 변곡점, 실질적 신뢰와 전략적 가교의 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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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시론] 찬성만 가득한 조직은 지금 침몰 중, '반대'라는 명약을 거부하는 리더들에게...,
- [지구일보 이창호 칼럼니스트] 오늘날 우리 사회의 리더십은 심각한 ‘확증 편향’의 늪에 빠져 있다. 정치는 진영 논리에 갇혀 반대편의 목소리를 ‘악(惡)’으로 규정하고, 기업과 조직은 효율이라는 미명 하에 상명하복의 침묵을 강요한다. 그러나 분명히 직시해야 할 사실이 있다. 찬성만 가득한 회의실은 리더의 유능함을 증명하는 장소가 아니라, 조직이 서서히 침몰하고 있음을 알리는 선명한 경고등이라는 점이다. ◇ 반대는 ‘불온한 도전’이 아닌 ‘최후의 보루’다 권위주의적 관성에 젖은 리더들은 반대 의견을 자신의 집정력에 괸한 도전이나 조직의 화합을 깨뜨리는 ‘불온한 잡음’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이는 본말이 전도된 시각이다. 조직을 진정으로 위협하는 것은 날카로운 반대가 아니라, 리더의 오판을 보고도 입을 닫는 ‘굴종적 침묵’이다. 역사의 비극은 언제나 리더의 귀를 즐겁게 하는 ‘예스맨’들의 합창 속에서 잉태되었다. 반대 목소리는 조직의 눈을 가리는 안개를 걷어내고, 리더의 독단이 낭떠러지로 향하지 않도록 붙잡는 최후의 안전장치다. 이 장치를 스스로 제거하는 리더는 스스로를 고립된 성벽 안에 가두는 격이며, 결국 그 성은 안으로부터 썩어 문드러지기 마련이다. ◇ 겸손함이 없는 리더십은 폭력이다 훌륭한 리더와 무능한 리더를 가르는 결정적 한 끗은 ‘지적 겸손함’에 있다.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는 지도력은 소통이 아니라 폭력이다. 자신의 경험과 직관만을 절대 선으로 믿고, 또 반대 의견을 주장하는 구성원을 수동적인 ‘부속품’으로 전락시킨다. 게다가 생각의 차이를 견디지 못하는 리더는 결국 자신보다 무능한 사람들만 곁에 두게 된다. 반면, 훌륭한 리더는 자신보다 뛰어난 반대자의 논리를 즐기며, 그 갈등의 에너지를 동력으로 삼는다. 반대를 두려워하는 리더는 자신의 약함을 숨기려 애쓰는 겁쟁이에 불과하지만, 반대를 경청하는 리더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 조직의 완성도를 높이는 전략가다. ◇ ‘심리적 안전감’이 혁신의 본령이다 혁신은 결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나오지 않는다. 혁신은 치열한 성찰과 자기 비판, 그리고 대안의 충돌이라는 용광로를 거쳐야만 그 형체를 드러낸다. 리더의 역할은 구성원들이 비판받을 두려움 없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을 보장하는 것이다. 반대 의견을 냈을 때 불이익을 걱정해야 하는 조직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다. 리더는 구성원들의 입을 막는 ‘권위의 칼’을 내려놓고, 누구나 자유롭게 논쟁할 수 있는 ‘광장의 자리’를 깔아야 한다. 반대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일그러진 전략을 끊임없이 수정하는 리더만이 조직을 지속 가능한 미래로 견인할 수 있다. ◇ 기필코, 반대자를 동반자로 삼으라 지금 시대가 갈망하는 리더는 무결점의 초인이 아니다. 반대 의견 속에서 보석 같은 통찰을 발견할 줄 아는 혜안을 가진 사람, 그리고 자신을 향한 비판을 혁신의 자양분으로 삼을 줄 아는 역량을 가진 사람이다. 리더여, 당신의 결정에 토를 다는 이들을 곁에 두라. 당신의 확신에 찬물을 끼얹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당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 ‘반대’야말로, 당신과 당신의 조직을 파멸에서 구할 유일한 명약이다. 반대라는 거울을 깨뜨리는 리더에게는 미래가 없다. [붙임] 이 기사가 마음에 닿으셨다면, 주변의 작은 광고 한 번 눌러 주시면 힘이 됩니다.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더 나은 기사와 정직한 보도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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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시론] 찬성만 가득한 조직은 지금 침몰 중, '반대'라는 명약을 거부하는 리더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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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겻불을 거부하는 자부심, 지금 우리에게 '선비 정신'은 있는가
- [지구일보 이창호 발행인] 오늘날의 효율 지상주의와 실용주의 관점에서 보면 이 말은 고리타분한 고집이나 시대착오적인 결벽증으로 읽힐지 모른다. 당장 얼어 죽을 판에 겨를 태운 보잘것없는 불이면 어떻고, 남이 쓰다 버린 온기면 어떠냐는 반문이 뒤따른다. 하지만 이 서늘한 문장 속에 담긴 본질은 단순히 추위를 참는 인내심에 있지 않다. 그것은 '비루하게 사느니 나의 긍지를 지키겠다'는 자기 원칙이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결과 중심 사회를 향한 준엄한 경고다. ◇ 겻불의 유혹, 원칙을 팔아 치우는 시대 우리가 사는 작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겻불'이 도처에 널려 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과정의 정의로움 따위는 생략해도 좋다는 식의 결과론적 사고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권력이라는 겻불을 쬐기 위해 어제의 신념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정치인, 부(富)라는 온기를 얻기 위해 타인의 눈물을 외면하는 자본, 그리고 대중의 관심을 얻기 위해 가짜 뉴스와 혐오를 생산하는 미디어까지 말이다. 과연 이들에게 '선비의 지조'는 조롱의 대상일 뿐이다. "일단 살고 봐야지",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식의 타협안은 우리 시대의 알량한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겻불은 잠깐의 온기만 줄 뿐, 몸속 깊은 곳의 한기를 몰아내지 못한다. 오히려 겻불에 몸을 녹이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옷'이 타들어 가는지도 모른 채 비굴한 안락함에 중독되고 만다. ◇ 선비 정신은 '자기 증명'의 기록이다 선비가 겻불을 거부한 이유는 그것이 '나의 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얻은 혜택, 구걸하듯 얻어낸 온기는, 결국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행위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주체적 자존감'의 문제와 직결된다. 진정한 리더와 깨어 있는 시민은 겻불 대신 스스로 장작을 패고 불을 지피는 고통을 선택한다. 비록 그 과정이 더디고 춥더라도, 스스로 일궈낸 온기만이 개인과 조직을 당당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원칙을 지키느라 겪는 고난은 '상처'가 아니라 위대한 '훈장'이다. 얼어 죽을지언정 겻불을 쬐지 않겠다는 결기는,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내면의 기둥을 세우는 작업이다. ◇ 타협의 미덕이라는 가면을 벗겨라 현대 사회는 갈등 조율이라는 명목하에 '타협'을 미화한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 합의는 중요하다. 그러나 결코 타협해서는 안 될 가치마저 겻불과 맞바꾸는 것은 합의가 아니라 '투항'이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수많은 부조리는 리더들이 '겻불의 유혹'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발생했다. 공정의 도덕적 가치를 훼손하면서 얻은 성과, 정의를 외면하며 쌓아 올린 평화는 모두 겻불에 불과하다. 그것은 언젠가 재만 남기고 사라질 허상이며, 그 재는 결국 우리 사회의 눈을 멀게 할 것이다. 선비 정신은 바로 그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모두가 겻불 주위에 모여들어 서로의 등을 다독일 때, 홀로 찬 바람을 맞으며 '이 길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 용기가 우리 사회의 마지막 도덕적 규범이 되어야 한다. ◇ 다시, 겻불 앞에 서서 우리는 저마다의 추위 속에 살고 있다. 불확실한 미래, 치열한 경쟁, 생존의 위협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겻불을 쬐라고 유혹한다. 게다가 "딱 한 번만 눈 감으면 따뜻해질 수 있다"는 속삭임은 달콤하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겻불을 쬐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조금 춥더라도, 조금 외롭더라도 자신의 불꽃을 지키며 꼿꼿이 서 있는 이들이 있을 때 사회는 비로소 품격을 갖춘다. 지금 당신의 눈앞에 놓인 그 온기는 정당한가? 혹시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한, 혹은 자신의 양심을 태워 만든 겻불은 아닌가? 얼어 죽을지언정 겻불은 쬐지 않겠다는 그 준엄한 기개가 있어야한다. 또 역설적으로는 우리 사회를 가장 따뜻하고 존엄하게 만드는 원동력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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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겻불을 거부하는 자부심, 지금 우리에게 '선비 정신'은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