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대 졸업, 미국 미주리대학교 자원경제학 박사 계간 에세이문예 신인상 수필로 등단, 한국본격문학가협회 부회장 고려대 학생처장, 고려대 노동대학원 원장 역임 현)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배움의 환희
김봉구/ 수필가, 고려대 명예교수
어느 날 한 연구원이 유학 문제를 상의하겠다고 나에게 면담요청을 해왔다. 그는 만 40세의 연구원으로 부인과 두 자녀를 두고 있으며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미국으로 박사학위를 위해 사직하고 유학을 떠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나는 답변하기를 주저했다. 배우는 것도 시기가 있는데 너무 늦었다고 지적했다. 집을 처분하고 가족을 동반해서 박사학위 하러 떠나기에는 리스크가 크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는 뜻을 굽히지 않고 다시 와서 추천서에 서명을 부탁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이 일을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다가 하나를 제안했다. 오늘 저녁에 별도로 만나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만날 장소를 여러 식당을 떠 올리다가 양주집으로 정했다. 겨울 어느 날 오후 5시에 만나서 양주 한 병을 앞에 놓고 마음속의 대화를 시작했다. 그 자리에 2페이지 분량의 자기소개서와 3페이지를 꽉 채운 이력서, 장문의 입학지원서를 내놓았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이미 영문으로 작성된 나의 추천서까지 제시했다.
이들 서류를 영문으로 작성한 배경을 그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연구원에 미국 박사 7명이나 있어서 그들에게 부탁해서 작성했고 리뷰까지 마쳤다고 했다. 교수님의 추천서도 이 과정을 거쳐 작성했으니 선생님은 서명만 해주시면 된다고 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그가 평소에 너무나 현명한 것을 넘어서 민첩하게 행동하기에 나는 어떻게 설득할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이제 마음속을 드러낼 결심이 섰다. 8시 30분이다. 자네의 자기소개서나 이력서를 보면 교수급에 해당할 정도로 지나치게 과장되어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안 된다. 이처럼 과장된 채로 미국대학에 보내면 신뢰를 완전히 잃게 된다.
나는 잠시 정부출연 연구기관에서 자원경제연구실장을 맡은 적이 있다. 그는 그때 같이 근무한 연구원이다. 서울대 농학과를 졸업하고 다른 기관에 종사하다가 자원경제연구실에 합류하였다. 당시 경제기획원으로부터 공공차관으로 진행된 중규모 수리시설 투자에 대한 경제분석연구를 위탁받아 수행했다. 연구보고서는 영문으로 작성하여 경제기획원에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그는 영문보고서 작성이나 발표회를 보면서 자기도 영어 실력을 쌓고 싶은 배움의 욕망을 잔뜩 키우고 있었다. 그 후 전문지식이 필요한 그는 K대 식품자원경제학과에서 석사학위과정을 마쳤다. 나는 지도교수로서 학부의 미시경제학, 재정학, 통계적 방법 등은 연구 수행에 꼭 갖추어야 할 기초지식이라고 지적했다.
백지 위에 볼펜을 꺼내놓고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쓰기 시작했다. 자기소개서는 간결하게 다섯 줄로 끝냈다. 불필요한 내용을 넣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이력서는 거의 모든 줄을 빨간 펜으로 그었다. 전부 다시 써야 한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자기소개서 와 비슷하게 단순하고 명확하게 핵심사항만 서술했다. 더 가관이었던 것은내 이름으로 작성된 추천서 내용이었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부풀려 작성한 글이었다. 이렇게 추천서를 써서 보내기에 미국 교수들이 한국 사람을 전혀 안 믿는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내가 일곱 줄 정도로 간결하게 추천서를 써서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미국대학에 입학지원 서신을 보냈다. 그 내용은 군더더기를 배제하고 새롭게 쓴 자기소개서 간략한 이력서 입학지원서와 성적증명서를 포함하고 있었다. 나는 별도로 지원대학에 추천서를 발송했다. 한 달 후 기적에 가까운 회신을 받았다. 박사과정 입학허가와 더불어 대학원 조교로 선발되었다는 통보였다. 그는 내 연구실에 와서 철저하게 고쳐주고 가르쳐 주셔서 이런 영광을 얻게 됐다고 감사를 표했다. 그때의 분위기 같으면 미국유학은 3년이면 끝날 것 같았지만 실제는 5년 후에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수석연구원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그는 박사학위만 받으면 신분상의 큰 변화를 기대했으나 현실은 다른 박사 소지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정년퇴임을 하면서 인생이 허무하다는 현실을 느꼈다. 어떤 호재의 기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년퇴임 후 MB정부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질 때였다. 어떻게 61학번을 알았는지 그가 내 연구실로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했다. 총리실 산하에 사회과학 연구소가 정부의 출연 연구기관을 관리한다면서 농촌경제연구원 원장 후보로 지원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쪽에 유력한 지인이 있어서 교수님의 추천만 있으면 연구원장으로 발령받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석사 지도교수를 한 적이 있어서 추천서를 써 주었다. 한 달 후에 농촌경제연구원 원장으로 발령이 났다. 놀라웠다. 정년퇴임 후에 소속기관의 원장으로 취임한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을 경이롭게 하기에 충분했다.
배움의 매력에 빠져있던 그 연구원이 정년퇴임 후에 연구원 원장 자리로 캄백하는 것은 ‘배움의 환희’가 아닌가. 격려할 일이다. 원장으로 재임 중일 때 내가 박사학위 논문심사위원으로 그를 위촉한 일이 있다. 그는 방문한 박사후보자에게 이렇게 멘트를 남겼다. “지도교수인 김 교수님이 논문을 읽었으면 내가 다시 읽을 필요가 없다”고 자기 생각을 밝혔다. 이 말을 전해 듣고 ‘원장의 마음에 새겨진 박사학위 유학을 준비할 때 끈질기게 설명하면서도 간결한 나의 표현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지도하기 어려웠던 한 사람을 인내를 가지고 올바르게 이끌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김봉구 약력
고려대 졸업, 미국 미주리대학교 자원경제학 박사
계간 에세이문예 신인상 수필로 등단, 한국본격문학가협회 부회장
고려대 학생처장, 고려대 노동대학원 원장 역임
현) 고려대학교 명예교수